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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시대 - 나의 한국현대사

by bigthing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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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2014, 55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이제는 개정판이 나와서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은 아마도 작가가 살아있다면 4~5년 쯤 후에 다시 개정판을 낼지는 잘 모르겠네요. 가장 가까운 시기의 일들은 기록만으로 남기고 판단은 후대의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당대의 사람이 당대의 일을 기록해 놓고 평가해 놓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기는 합니다.

 

목차를 보시죠.

서문: 위험한 현대사
프롤로그: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역사체험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1959년 돼지띠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욕망의 위계
그라운드 제로, 그리고 욕망의 질주

제2장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냉전의 모델하우스
반민특위의 슬픈 종말
미완의 혁명 4·19
성공한 쿠데타 5·16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한강의 기적
이륙에서 대중소비사회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
한국형 경제성장의 비결
외환위기, 원인과 결과
양극화의 시대

제4장 한국형 민주화: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민주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5·16에서 10월 유신까지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10·26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제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늙어가는 대한민국
가족계획과 기생충 박멸
민둥산을 금수강산으로
금서, 금지곡, 국민교육헌장
전태일, 문송면, 반올림
안보국가에서 복지국가로

제6장 남북관계 70년: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레드 콤플렉스
장성택과 이석기
간첩, made in Korea
세 번의 전환점
정전협정체제와 북핵문제
평화통일로 가는 길

에필로그: 세월호의 비극, 우리 안의 미래
참고문헌

 

5장 첫번째의 '늙어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부분은 상당히 아픈 부분이 아닐 수가 없네요. 지금도 계속 저출산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미 늦어버린게 아닐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책의 내용들을 한번 보시죠. 작가의 필력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한두곳이 아닙니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이순신, 김유신, 궁예, 항우, 악비, 장자방, 제갈공명,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왠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는 지성과 지식을 가진 이를 우러러보며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한,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고등학생 시절 출세라는 것을 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공부보다 정부와 싸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 야학에서 같은 연배의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며, 학생회 임원을 맡았다가 감옥 구경을 하기도 했다. 스물여섯 살 이후에는 주로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했으며, 30대 중반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더 공부했다. 40대에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점시 공직사회를 경험했다.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경북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나는 나를 그렇게 규정한다. (18쪽)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발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 발생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
하는 데서 출발해서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57쪽)

우리 현대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왜 자매가 아니고 하필 형제냐고, 이것도 성차별이 아니냐고 하진 마시라. 자매보다는 형제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7~68쪽)

1978년 1월, 입학시험을 보러 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는 교문이 없었다. 데모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동숭동에 있던 캠퍼스를 관악산 아래 골프장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등산객이 드물었고 관악산 계곡에서 신림동으로 흐르는 개천 여기저기에 판잣집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포항제철의 철강생산 능력을 보여주는 대형 철제 교문이 들어섰다. 국립서울대학교를 나타내는 ‘ㄱㅅㄷ’을 기하학적으로 결합해 만든 교문을 우리는 ‘공산당’ 또는 ‘계집 술 담배’의 약자라며 낄낄대곤 했다. 학교 앞 개천이 복개되었고 판잣집은 철거되었으며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도 깨끗하게 포장되었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봉천동 달동네 자취방은 블록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냉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연탄으로 구들장을 데웠고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었다. 전기장판과 전기밥솥이 나왔지만 전기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쓰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경제생활은 내가 초등학생 시절 보았던 것과는 아주 크게 달라졌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10년 전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부터 10?26사건이 터진 1970년대 후반까지 내가 본 경제생활의 변화였다. (108~109쪽)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188쪽)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고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퍼센트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 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194쪽)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 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운데서 누군가 ‘십 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225~226쪽)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257쪽)

한국의 전후 베이비부머들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는 몰라도 대변검사는 안다. 그들에게 대변검사는 즐겁지는 않지만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처음 채변봉투를 받은 것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와 문교부가 학생들에 대한 집단 기생충 검사를 시작한 1969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조그만 흰색 종이봉투 안에 더 작은 비닐봉지가 들어 있었다. 나뭇가지로 대변을 찍어 비닐봉지에 담고 인적 사항을 기재한 종이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결과가 나오면 담임선생님과 양호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기생충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른 약을 주었다. 반 친구들 태반이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어야 했다. 나는 회충약을 받았는데, 한 주먹이나 될 만큼 양이 많아서 먹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298쪽)

고용보험법은 1990년 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에서 검토하기 시작했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제정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애했던 이인제 노동부장관은 전경련과 경총, 보수언론의 엄청난 비난에 굴하지 않고 1995년 7월부터 종업원이 30명 넘는 모든 기업의 상용근로자를 피보험자로 하는 시행령을 확정함으로써 고용보험을 출범시켰다. 이때가 정치인 이인제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빨갱이라는 욕설에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을 관철했다. 경선불복과 잦은 당적변경 사실을 두고 그를 비웃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고용보험을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정치인생은 의미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347쪽)

우리 세대는 반공백일장을 하고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반공표어를 짓고 반공웅변대회와 반공궐기대회를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첩을 식별하는 방법을 배웠다. 새벽에 구겨진 양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친척,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는 사람, 직업이 없는데도 고급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다. 혼자 여관에 투숙하면서 ‘아가씨를 부르지 않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19금 식별법’도 있었다. 제일 널리 퍼진 반공 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어는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지 다시 보자”였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이웃을 간첩으로 의심하도록 권하는 세상을 산 것이다. 학생들의 반공궐기대회 강제동원은 없어졌지만 반공포스터 그리기는 요즘도 여전한 모양이다. 최근 어느 초등학교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반공 포스터가 무척 깜찍했다.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363쪽)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최초 폭로한 인물은 조갑제 기자였다. 그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이수근 사건을 심층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극우 지식인’ 조갑제 씨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형수의 인간적 진실을 탐사한 민완기자였
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건조하고 날렵한 조갑제 기자의 문장과 날카로운 시선을 무척 좋아했다. (366~367쪽)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고 한 적이 없다. 동독 국민이 원하고 동독 정부가 결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교류 협력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동독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한 것이다. 서독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동독 정부의 무장을 해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브란트 총리가 펼쳤던 새로운 동방정책의 한국적 버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관점에서 평화공존과 높은 수준의 교류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명하는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에 이르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길을 찾으러 굳이 머나먼 드레스덴에 갈 필요는 없었다. (406쪽)

세월호의 비극은, 어쩌면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보다 슬픔은 더 깊었고 분노는 더 뜨거웠으며 아픔은 더 컸다. 도대체 무엇이 지방선거 후보 경선 등 정당의 행사는 물론이요 지역축제와 동호인 행사까지 군말 없이 취소하게 만든 것일까? 나는 그것이 연민, 죄책감, 미안함 같은 감정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명共鳴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유가족에 대한 연민,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사랑과 우정에 대한 공감,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탐욕과 부패의 구렁텅이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겪어야 했던 혹심한 고통에 대한 공명이다. 만약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오늘보다 더 훌륭한, 최소한 지금보다 덜 추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런 대한민국을 만드는 힘은 바로 이 죄책감과 공명에서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415쪽)

 

이책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코멘트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능력도 필력도 재주도 없기 때문이죠. 대신 출판사에서 써놓은 이 리뷰로 모든 것을 대신하겠습니다.

 

*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위험한 현대사’ 읽기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경북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정치계를 떠나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유시민이 스스로를 정의한 내용이다. 1959년 7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유시민은 경주여중 역사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4녀 2남 중 다섯째 아들로 자라났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이듬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이후 18년 동안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유시민을 비롯한 ‘59년 돼지띠’들에게 ‘대통령은 곧 박정희’였던 때였으며, 청년 유시민은 독재체제의 대한민국을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바꾸는 길에 동참하게 된다. 유시민이 소자산계급을 의미하는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리버럴’(자유주의자)이 된 것은 그 개인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직업정치인의 옷을 벗고 작가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이후 펴낸 첫 번째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어 유시민이 야심차게 선택한 주제가 바로 한국현대사다. 현대사야말로 고대사, 중세사 등과는 달리 해당 인물들이 생존해 있는 경우가 많아 상당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까다로운 분야다.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하기에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유시민은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소회를 피력한다.

그런 마음으로 최근에 펴낸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은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인 유시민이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왜 55년인가? 1959년 돼지띠 출생자 중에서 유일하게 국무위원을 지낸 유시민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다뤘기 때문이다(향후 5년 단위로 개정판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현대사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큰 줄기로 삼고 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잔가지로 삼아 엮어낸 이 책은 현대사라기보다 ‘현재사’現在史 또는 ‘당대사’當代史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959년부터 현재까지 끝없이 번민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 바로 ‘공감’이다.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드는 힘은 공감하는 능력에서 나오며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은 역사 속에 있다고 말하는 유시민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존엄성과 어리석음, 아름다움과 추함 모두를 인정하고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분노와 자부심 같은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우리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호소한다. 더불어 그 공감의 폭이 가장 넓은 동년배들에게는 작은 위로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 청년들에게는 의미 있는 조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등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대중역사서의 집필 경험과 직업정치인의 경험을 십분 살려 우리 현대사를 저자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필력으로 풀어 쓴 이 책은 일반 역사서와는 확연히 달리 저자의 직접적인 체험이 곳곳에 녹아 있어 생생함과 흥미로움을 더한다.


* 저자의 개인적 체험과 개성으로 길어 올린 우리 시대 공통의 역사적 경험

대표적인 진보지식인으로 통하는 저자 유시민은 진보와 보수, 영·호남, 세대 간의 갈등이 여전한 지금 우리 현대사에 ‘제한적인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히며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이는 일반적인 진보진영의 입장과 비교할 때 꽤 유연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그 공과를 언급하며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만큼 이륙할 수 있게 된 동력인 산업화의 과정을 면밀히 고찰한다(물론 이 정도의 산업화를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광복 14년, 정부 수립 11년,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겨우 6년이 지난 1959년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이래 무려 18년간 같은 대통령 밑에서 자라야 했던 당대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만큼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그가 세상을 달리한 지 35년이 흐름 지금, 그의 딸이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59년 돼지띠’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는 만큼 유시민은 같은 시대를 열심히 달려온 동시대인들을 ‘벗’으로 호명한다. 저자는 그 무수한 ‘벗’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유시민은 2012년에 치러진 제18대 대선이 진보와 보수 간 ‘역사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1,577만 명에 달하는 유권자들, 특히 고령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은 그들이 살았던 삶과 시대를 인정받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유시민의 눈에 비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잠시 살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며, 박정희 대통령은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성공한 독재자’였고, 전두환 정권은 불필요한 독재의 연장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가장 평가절하되어 있으나 그의 대북정책만큼은 높이 사야 하며, 김영삼 대통령은 한때 드높은 결기가 빛나던 멋진 시절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킨 인물이며,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확고한 민주주의자였다고 평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 외에는 말할 거리가 없는 인물로,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경제·대북정책 모든 면에서 별 기대를 하기 어려운 인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에서 51퍼센트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이 비록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라도 비정상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수결로 권력자를 뽑는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더 훌륭한 사람의 당선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책에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인한 하야, 곧이어 일어난 5·16군사쿠데타와 18년에 걸친 군사독재,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과 경제성장 가시화, 전두환 정권과 5·18광주민중항쟁, 1970년대 반독재투쟁과 1980년대 민주화투쟁, 노태우·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숱한 간첩조작 사건 등의 굵직한 정치적 이슈는 물론, 1970~1990년대 일상사·문화사와 관련한 주요 역사적 사실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 중간중간에 어릴 적 이종사촌형이 빨간색 ‘포니’를 몰고 흙탕물을 가르며 시골 외가의 농로를 달려오던 모습에서 느낀 순수한 감동이라든가 주변에 밥을 굶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 텔레비전이 최초로 등장하던 때의 일화, 기생충문제와 채변봉투에 얽힌 추억, 학생운동을 하던 당시에 저자가 직접 체험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때의 경험과 이틀 뒤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을 홀로 지키다 계엄군에 체포된 이야기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또한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선별한 보건·위생문제와 복지문제에 대한 견해 등 일반 역사서에서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해 장년층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청년층에게는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간접경험을 선사한다.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는 우리 현대사의 면면에는 독재와 압축 성장으로 인한 만성적인 부패와 그에 따른 진통, 오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국민들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 갈피마다 새겨져 있는 조봉암, 이병철, 정주영, 신현확, 장준하, 백기완, 전태일, 김세진, 박종철, 이한열, 문송면 등의 숱한 이름 앞에서 저마다 느끼는 감정과 평가는 다르겠지만 이미 있었던 역사적 사실 자체가 달라질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역사적 사실을 어떤 시각과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역사인식의 층위가 달라지는 것이며, 이 때문에 역사논쟁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 55년의 민낯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 명이었으며 국내총생산GDP은 19억 달러, 1인당 GDP는 81달러(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달러)였다. 당시 세계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2014년 현재 인구는 5,100만여 명으로 두 배, 국내총생산은 (2013년 기준) 약 1조 3,000억 달러로 684배, 1인당 GDP는 약 2만 6,000달러로 320배,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한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난민촌이나 다름없던 병영국가·안보국가에서 급속한 고령화를 걱정해야 하는 민주국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명실상부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지만 지구상에서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이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룬 나라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변화속도는 거의 광속이라 할 만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사건,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2010년 천안함 사건, 최근의 세월호 참사 등 우리 현대사를 억울한 죽음으로 얼룩지게 만든 대형 참사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3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사회경제적·정치적·문화적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여 년 동안에 일어났으니 부작용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며,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입장 차이를 절충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두 세력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데만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까.
유시민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고 우리 현대사를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으로 읽는다. 리더의 조건으로 봤을 때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대표는 각각 박정희·김대중 대통령이며 그들이 우리 현대사에 각인한 인격이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저자 자신은 의당 민주화세력으로 분류되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선호도 조사를 참고할 때 우리 국민은 두 세력을 거의 50대 50으로 인정해왔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 모두 우리의 과거이며 따라서 둘 중 하나만을 인정하는 자세는 온전한 역사인식·현실인식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논쟁이 뜨거운 지금,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 인생관을 가졌다 해도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 간극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역사교양서로서 이 책이 갖는 미덕은 전문 역사가의 냉정하고 건조한 분석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저자가 가려 뽑은 현대사 55년의 주요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평가에 있다. 회고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전망해보기 위해 당대인들끼리, 나아가 세대 간에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눠보자는 초청장인 셈이다.
앞선 세대의 시행착오를 거울로 삼아 ‘침몰해가는 대한민국호’를 구해낼 공동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때 마침맞게 나온 이 책을 벗 삼아 유시민이 말하는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 55년의 민낯을 각자의 경험과 해석을 곁들여 만나보자. 역사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역사논쟁이 몰고 온 현대사 바람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인문학의 오랜 중심주제였으며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물음일 것이다.
교학사 ‘뉴라이트’ 교과서 파동에 이어 최근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역사인식 문제로 다시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역사논쟁 바람이 일었다. 이를 반영하듯 유시민의 신간은 출간 전 예약판매 3일 만에 5,000여 부가 나가 가볍게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다(7월 초 기준 알라딘 1위, 예스24 5위 등). 이는 지난 18대 대선 직후 서점가에 현대사 바람이 불었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와 정부 여당 고위직들의 막말 파동, 총리 후보자들의 연이은 낙마와 정홍원 총리 유임 등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성과 더불어 자식 세대를 위한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그만큼 깊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예판 독자의 80퍼센트가 35~54세 남성이었으며 전체 독자군 중 45~54세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한국사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책을 읽어보고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상 오늘의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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